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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재미있는 바이오이야기/(5)개인 발간수필모음

[수필]12.梨花에 月白하고

by 바이오스토리 2013. 12. 31.

梨花月白하고

인하대 생명화공학부 김은기

  이화에 월백하고......”

 

J가 운을 띠자 시끌벅적하던 자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다음 구절을 강요하고 있었다.

 

은한이 삼경일제......”

 

어느 구석에선가 들러오는 답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답의 근원지는 구석에 앉아있던 P이다. 자리는 또 다시 정적이 흐른다. 흡사 처음 운을 던져놓은 과거시험 같은 팽팽한 분위기가 좌중을 압도한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한 건 늘 사람을 웃기던 K이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흐트러진다.

이곳저곳 에서 이런 말, 저런 구절을 계속하여 읊어대지만 웃음만을 자아내는 엉뚱한 소리들이다. 실없는 답을 한 친구들에게 막걸리를 한잔씩 벌로 안긴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때 그리도 달달 외던 시조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을 서로 흠잡으면서 다시 기억과 추억을 위해 탁한 막걸리 양푼그릇이 오간다.

 

일렬로 늘어선 탁자에 등받이가 없는 나무 의자는 오십 년대 동네 선술집의 모습 그대로이다. 갓을 달지 않은 전구는 하얀 벽을 비추면서 흔들리고 속이 훤히 보이는 맨몸의 전구 알은 무엇 하나 감추지 않겠다는 듯 사람들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있다. 벽지는 시간이 흘렀음을 알려주는 듯 누런색으로 변해 있었고 그 위를 큰 글씨, 작은 글자의 낙서들이 촘촘히 메우고 있다. 앉아있는 동료들의 지긋한 나이에 비하면 벽의 낙서는 이곳이 한참의 청춘들이 드나드는 대학가임을 알려주고 있다. 변소에 쓰여 있는 유치한 낙서도 아니고 시국을 논하는 비분강개한 어조도 아닌 소소한 일들이 벽을 메운다. 대학생들의 숨김없는 마음들이 막걸리와 함께 그대로 표출된다. 졸업 후에 먹고 살 걱정, 여자 친구와의 무용담, 낯간지러운 사랑고백, 비싼 등록금 걱정.... 하지만 그래도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술에 대한 예찬이다.

 

술타령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이 집의 막걸리는 그 맛이 특이하다, 아니 월등하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마시는 막걸리는 대부분 플라스틱 병에 담겨있고 막걸리 만드는 회사와 상관없이 탁한 쓴 맛이 뒤 끝에 남는다. 예전에는 막걸리 맛을 위해서 카바이드도 사용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한밤중에 불을 밝히기 위해서 밤낚시나 혹은 노점상들이 사용하던 카바이드의 그 냄새는 바로 시중의 막걸리에서도 그대로 우러나서 이 이야기가 그리 허황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허나 이 집의 막걸리는 전혀 그런 인공의 맛이 없다. 걸쭉하면서도 혀를 스치는 매끄러운 감촉은 잘 익은 김치를 그대로 한입 가득히 집어넣었을 때의 맛처럼 혀를 감싸 안는다. 또한 혀의 또 다른 구석에서는 꿀을 한술 가득 퍼 담은 수저를 입에서 아까운 듯 굴리는 달콤함도 있다. 막걸리는 커다란 주전자에 담아서 온다. 큰 독을 땅 속에 묻고 가득한 막걸리를 긴 막대로 휘휘 저은 후 죽 잡아 빼면 막대기 끝에 매달린 큰 그릇에 엷은 황금빛의 액체가 철철 넘친다. 이곳저곳 온전치 않은 주전자에 콸콸 붓는 소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입맛을 다시게 한다.

 

이런 부산스러움과 활기, 푸짐한 안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걸쭉한 막걸리 때문에 많은 대학생들이 학교 앞의 이 집을 가득 메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공간과 저쪽의 넓은 공간을 나누는 것은 미닫이문을 통한 벽 하나뿐 이지만 족히 삼십년의 세월차이가 두 방을 나누고 있다. 한참의 젊은 대학생들이 바깥을 가득 메우며 삼삼오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고 이제 족히 장년에 들어선 흰머리 희끗한 또 한 무리의 동료들은 이편에 앉아서 지난 시간들의 조각을 찾아 맞추며 막걸리잔 을 들고 있다.

 

막걸리를 처음 마셔본 순간의 컬컬함의 기억은 지금도 목을 간질거리게 한다. 매일 한 주전자 이상의 막걸리를 마시던 큰 형님은 일곱 살의 어린 나에게도 심부름을 시켰다. 지금이라면 술을 미성년자에게 사오라고 하는 것이 불법이냐 아니냐를 놓고 시비가 붙을 사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술 주전자를 들고 동네 구멍가게로 향하는 일은 오히려 당당하고 기다리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딸랑거리는 주전자를 흔들면서 다녀오던 시간이 컴컴한 밤도, 어스름한 저녁도 아닌 훤한 대낮이었다는 기억은 지금도 생경하다. 이십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 선생님이던 형님은 낮에도 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풋고추와 함께 마시던 것이 중요한 즐거움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코끝이 빨간 주정뱅이의 모습의 기억은 전혀 없다.

 

집 뒤에는 높은 철봉이 하나 있었다. 나의 키로는 어림도 없는 그 철봉에 가볍게 올라선다. 그리고는 밀가루를 손에 칠하고 굵은 천으로 손과 철봉을 감싸 맨다. 가볍게 몸을 한두 번 앞뒤로 구른다. 점점 빨라지던 앞뒤로의 구름은 어느 순간 철봉 꼭대기를 넘어서면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철봉을 중심으로 빙빙 돌다가는 꼭대기에서 잠시 멈추어 선다. 반듯이 펴져있는 몸과 다리 끝에서 부터 날이 선 듯 한 하얀 운동복이 푸른 하늘에 날렵하다. 다시 아래를 향해 내려가는 순간은 마치 절벽에서 아래를 향해 내리꽂는 한 마리의 바다새 모습이다. 보고 있는 나도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듯 하다 오금이 저린다. 날아가는 듯 한 가벼운 몸매에 손가락은 희고 길었다. 심부름을 가는 내 손에 지폐를 쥐어주던 손이 피아니스트의 길고 가는 손가락을 연상케 하는 형님에게 막걸리보다는 오히려 소주의 탁 쏘는 맛이 더욱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막걸리 가게는 눈을 자극하는 것들이 그득한 보물창고였다. 조그만 동네 구멍가게였지만 알사탕과 캐러멜 과자는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주전자를 받아든 가게 아주머니는 뒤 바닥에 묻어놓은 커다란 항아리에서 막걸리를 퍼 담느라 가려서 보이지를 않는다. 순간 가슴이 뛴다. 입안에 살살 녹던 알사탕, 그리고 쫄깃쫄깃 혀에 달라붙던 캐러멜 과자. 손만 뻗으면 금세 주머니에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유혹은 가까웠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와 간질거리던 손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몸에 살아있는 듯 느낌이 남아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였지만 나에게 잠재해 있던 도벽이 더 이상 발전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주전자를 받아들고 돌아선다. 그 순간을 넘기고, 아니 넘긴다보다는 알사탕과 캐러멜을 포기하고 돌아올 수 있던 까닭은 또 다른 숨겨 놓은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골목길에 꺾어 들면서 주전자 끝에 입을 대고는 한번 쭉 들이킨다. 이 맛이 알사탕보다 캐러멜보다 훨씬 더 짜릿했다. 숨겨놓은 떡이 더 맛있다고 했나. 그때의 톡 쏘는 사이다 맛, 컬컬하고 걸쭉한 맛이 나에게 각인된 막걸리의 맛이다. 좁은 골목길에서 혼자 몰래 먹던 막걸리의 그 아슬아슬한 맛은 사탕을 보면서 가슴 떨리던 순간과 함께 일곱 살의 나를 아주 가까이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술주정뱅이도, 소매치기가 되어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형님이 천수를 다하지 않으면서 나를 그 유혹에서 벗어나게 한지도 모르겠다.

 

주위에 있는 동료들은 오랜만에 맛보는 막걸리와 두부김치, 그리고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이곳을 오기 전에 J는 학회 참여자인 우리들을 저녁이 깃든 캠퍼스로 안내했다. 사월의 꽃인 영산홍이 양옆으로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 봄날의 어스름 저녁 그리고 젊은 학생들의 하늘을 찌르는 웃음소리는 이곳이 대학 캠퍼스임을 알려주고 우리들을 집 떠난 여행자처럼 마음을 설레게 한다. 매년 지방에서 열리는 학회를 참가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지방의 색다른 정취를 맘껏 느낄 수 있는 푸근한 분위기이다. 물론 학회를 준비하는 당사자들은 더 없이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그런 힘든 와중에서도 참가자들에게 이런 막걸리를 맛보이게 하는 J는 사람들을 아주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은 나이에 사람을 편케 하는 것을 단지 재주라 칭할 수 있으리오. 수십 년을 닦아온 덕행이요, 몸에 배인 인품 인 것을....

 

이런 넘치는 대접을 받는 나는 정성의 과분함에 내심 미안할 뿐이다. 지방에 가면 늘 그곳에 있는 학회의 동료들로부터 많은 대접을 받는다. 이에 반해 나의 동료에 대한 정성은 근처에도 미치지 못한다. 서울에 산다는 핑계로 어쩌다 상경하는 동료들을 그냥 돌아가게 만들거나 기껏해야 저녁이나 먹고는 의무를 다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냥 내려가라는 다른 표현일 밖에. 서울에도 보여줄 서울만의 풍경이 많이 있을 터인데 당연히 서울에는 정취가 없으리라 미루어 짐작한다. 사람에 대한 정과 베풀음이 부족한 탓과 아직 덜 닦여진 품성으로 객을 편케 대접하는 덕행을 못 쌓았나보다.

 

셀 수 없이 많은 주전자의 막걸리가 비워지고 그득하던 동료들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고 아직 성이 차지 않은 서너 명이 마지막 잔을 비우고 문을 나서서야 J는 슬그머니 남겨놓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일제…….’

바로 오늘이 보름이고 날이 맑아 달빛이 밝으니 배꽃을 보러가자는 것이다. 그러고는 대답을 할 틈도 주지 않고 택시를 불러 세운다. 대학을 벗어난 근처의 깊은 산골짜기에 오솔길이 있고 배꽃이 피어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두말 않고 따라선 그곳에는 깊고 호젓한 산길이 있었다. 시내로부터 많이 떨어져있는지 불빛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밝은 달은 이미 하늘 한 가운데서 온 사방을 비추고 있다. 은은했다. 저 건너 보이는 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고, 산의 기슭이 검은 천처럼 사방을 두른 그 한가운데 배꽃들이 흰 눈밭처럼 펼쳐져 있다. 배꽃은 달빛에 휩싸여 희다 못해 푸른빛으로 그 흰빛을 뿌려내는 듯하다. 가지 하나하나가 무슨 근심을 품은 듯, 처연한 빛을 발한다. 은은한 달빛 아래의 배꽃은 이미 한 잔의 술로 느슨해진 나의 혼을 깊은 꿈으로 이끌고 있다.

 

학창시절 태릉 배 밭에서 보았던 그 배꽃은 조용한 산중에서 지금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다. 취기 때문인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십 년 동안 난 같은 모습으로 널 지키고 보살펴 주었는데 너는 그 보답으로 무얼 했냐고 물어보는 것인가. 너는 밤늦게 동료들을 이런 장소에 데려갈 정성도, 품성도 없지 않느냐고 묻는 것 인가. 취기와 감상에 젖은 나를 J가 깨운다. 그리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나의 갈증을 풀어준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냐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드러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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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이 피어있는 달밤, 은하수 흘러가는 삼경에

한 가닥 가지에 피어나는 봄뜻을 소쩍새가 알겠냐마는

정이 많음도 병인것 같아 잠 못 들어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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