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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재미있는 바이오이야기/(5)개인 발간수필모음

[수필] 9. 맹인의 윙크

by 바이오스토리 2013. 11. 27.

맹인의 윙크

 
사서 고생을 하고 있구먼. 투덜거림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몇 번을 물어서 왔는지 모른다. 일행과 함께 찾아간 곳은 싱가포르 외곽에 있는 야시장이다. 후덥지근한 날씨는 저녁이 되어서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울 한여름 밤의 끈끈함이 피부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제일 싫어하는 날씨이다. 유난히 땀이 많은 나에게 적도의 바로 밑에 있는 싱가포르란 나라는 도무지 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던 곳이기도 하였다. 한국은 시원한 겨울인데 여기까지 와서 웬 고생이람.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기는 나도 예외는 아닌듯하다. 서울의 추위가 아파트의 수도를 얼어 터트릴 때에는 뜨끈뜨끈한 열대의 나라에서 반팔로 활보하면 어떨까 하곤 했다. 마침 하고 있는 연구와 관련된 학회가 개최되는 곳이라기에 발표를 해야 하는 의무감 반, 호기심 반으로 신청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내에 내린 순간부터 한국의 쌀쌀한 겨울바람이 그리워지며 툴툴거리는 소리가 내 입에서 맴돈다.

 

반면 같이 가는 일행은 싱글벙글 이다. 사백만이 안 되는 싱가포르란 나라가 왜 이런 선진국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에 즐거워하고 있다. 공항에서부터 쾌적한 철도가 시내 한 가운데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도 신기한 모양이다. 오기 전부터 이 나라에 대해서 많은 조사를 하고 왔는지 왜 이 나라가 잘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에게 묻는다. 떨떠름한 나의 대답에 준비하고 있었던 자기 생각을 금방 이야기한다. 지나가는 시내의 가지런하고 잘 정돈된 모습이 마치 일본 같다고 감탄을 한다. 같이 가는 입장에서 모른 체 할 수도 없어서 대꾸는 하지만 별로 흥이 나지는 않는다. 끈끈한 날씨 탓인가.

 

떨떠름한 기분을 끈끈한 날씨 핑계로 대기에는 이곳의 냉방시설은 완벽했다. 전철도, 택시도, 그리고 호텔내부도 시원한 에어컨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 날씨 탓은 아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해진다면 나는 오기 전부터 해외학회자체에 시큰둥해져 있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하여도 해외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었다. 그리고 그 시간부터 머릿속은 그곳의 그림으로 가득했다. 학회를 참가하면서 시내곳곳의 풍경과 광장에서의 생맥주한잔에 즐거워하던 기억이 바로 전인데 언제부터인가 해내야하는 일로, 참가해야 하는 출장으로 변했다. 아마도 긴 여행을 하기에는 체력이 많이 떨어진 탓이 아닐까 변명을 해보지만 스스로의 변명인 것 같아 개운치는 않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겁이 난다. 더구나 열 시간이 넘어가는 긴 비행은 공포,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공항에 들어 설 때면 이 고생을 어찌하나하는 생각에 어떡하면 좀 더 편한 좌석을 받을까 혹시 옆자리는 안 빌까하는 기대를 한다. 언제부터인가 비행기의 창가 좌석에 앉아본 적이 별로 없다. 좁은 좌석에 앉아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몇 시간을 간다는 생각 만해도 폐쇄공포증에 가깝게 나를 옥죄인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참 내가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쓴 웃음을 짓는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뉴욕의 학회에 가던 날, 나는 망설임 없이 창가자리를 원했고 창에 머리를 박고는 바깥풍경에 눈을 떼지 못 하였다. 이부자락을 펼쳐놓은 구름, 그 구름위로 차고 오르는 눈이 아픈 홍시 빛의 태양, 한 손에 잡히는 산의 모습, 물결치는 사막의 모래밭. 열여섯 시간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즐거움의 시간이었다. 그런 내가 이제는 창가좌석은 절대 앉아서는 안 되는 감옥쯤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는 혹시 일반석 좌석이 꽉 차서 비즈니스 좌석으로 변경되는 행운을 매번 기대하고 있다. 요즈음 급격히 떨어진 체력 탓이겠지 스스로 위안을 한다. 하지만 역시 배부른 자의 변명이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곳은 싱가포르 시내의 횟집이 비싸다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온 곳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일행의 왕성한 호기심에 끌리다시피 따라온 곳이다. 전철에서 내려 걸으면서 척척 달라붙는 여름밤의 끈끈한 밤길을 비행기 창가좌석을 배정받은 기분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하지만 눈앞의 횟집센터가 시원한 에어컨이 돌아가는 건물내부가 아니라 운동장 같은 야외 재래시장이라니. 몇 푼 아끼겠다고 따라온 나의 우둔함을 탓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오늘은 재수 없는 날인 걸 어쩌라 포기를 한다.

 

이곳 싱가포르 횟집센터는 서울의 어느 먹자골목을 연상시킨다. 다른 점이라면 일렬로 늘어선 먹자골목에 비해서 이곳은 커다란 광장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횟집들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생선회와 음식들을 팔고 있어서 처음에 들어와서는 대개 한바퀴를 쭉 돌게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외국인 티가 나는지 금세 몇 사람이 다가와서는 설명을 한다. 가격을 보니 시내와 크게 다름이 없다. 호텔보이 녀석,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개를 해주었구나. 가서 무어라 해야지. 채 반 바퀴도 못 돌고 극성스럽게 따라붙는 할머니에 이끌려 구석자리에 앉았다. 후끈거리는 날씨와 꽉 차있는 사람의 열기. 천장에 매달려있는 선풍기가 열심히 돌고 있지만 밀려오는 열기와 끈끈함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음식을 시키고 미지근한 맥주로 갈증을 달래고 있었다. 앞의 동료는 쇼우윈도우처럼 늘어선 상점들의 서로 다른 음식들이 무엇으로 만들어 진 것인지 나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소리는 한 귀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늘어선 메뉴판을 둘러보면서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른 그들의 모습이 나를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앞서 가고 뒤에서 한 사람이 따라가면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을 둘러싸듯이 하면서 뭔가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뭔가 달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심히 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한 가운데에서 걷고 있는 사람은 맹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손에는 흰색의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그 맹인은 젊은 여자였다.

 

서울에서 맹인을 자주 보는 곳은 지하철이다. 구걸을 목적으로 지하철을 오고가는 그들은 대부분 나이가 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홀로 다녔다.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면서 다니는 그들의 표정은 늘 어둡다. 하기는 동냥을 하는 입장에서 표정이 밝을 수는 없겠지만 늘 무표정하였다. 몇 닢의 동전을 건네주어도 대부분 무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린다. 그 무표정에 더욱 무안해져서 내민 손을 얼른 손을 거두고는 했다. 그렇게 각인된 맹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앞에 지나가는 여자맹인은 내가 맹인이라는 것을 눈치 못 챌 만큼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 때문인가. 내가 눈길을 그곳에서 떼지 못하자 앞에 있던 동료도 그곳을 바라본다. 그들, 맹인을 포함한 네 명은 가족이거나 가까운 친척처럼 보였다. 여자맹인은 삼십대 초반쯤 되어 보인다. 앞에 가던 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맹인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설명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메뉴판을 보면서 요리종류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뒤를 따라가는 남자는 맹인에게 생선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잠시 멈출 때마다 요리방향으로 돌아서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여자맹인은 마치 눈앞에 진열된 생선요리를 보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끄떡이고는 그리고 무어라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아니 맹인이 그들에게 무어라 웃으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저 여자가 진짜 맹인인가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 여자 맹인은 마치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왔던 상점 앞을 지나면서 요리를 고르면서 지나갔다.

 

짧은 시간에 지나간 그들의 모습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 같이 나의 마음에 남았다. 그들의 모습에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나를 앞의 동료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들이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내가 두 번째 잔을 채웠을 때였다. 아마도 둥그렇게 늘어선 상점들을 다 돌아다보고 무엇을 먹을까 결정한 듯 무어라 이야기하면서 몇 테이블 건너에 둘러앉는다. 메뉴를 가운데 놓고 웃는 모습의 맹인이 보인다. 혹시 부유한 맹인인가. 하지만 이곳은 서민들이 즐겨 찾는 변두리의 야시장 같은 곳이다. 또한 그들의 옷차림새는 밝았지만 비싸 보이지는 않았다. 부자여서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는 나는 실소를 한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었다. 기다리던 요리가 나오자 그들은 다시 한 번 박수를 친다. 가운데 여자 맹인도 그 접시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 마치 상자를 열자 나오는 아이스크림을 보고 좋다고 박수를 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내가 저렇게 무엇을 보고 즐거워하던 것이 언제인가 기억해보려 애쓴다. 앞의 동료가 무어라 말을 하지만 귀로 흘러갔다. 그 테이블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그들은 기도를 시작하고 있었다. 여자 맹인의 낭랑한 기도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오는 듯 했다. 갑자기 번쩍하는 빛이 난다. 사진을 찍는다. 아마 오랜만의 외출을 기념하려나 보다. 그 가운데에서 맹인이 두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인다.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그 여자맹인은 윙크를 한다.

 

앞의 동료가 다시 무어라하지만 미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나는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었다. 차갑고 튀어 오르는 맛에 몸이, 그리고 연이어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미지근했던 맥주가 갑자기 차가워 졌나 맥주잔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본다. 맹인의 윙크가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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