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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재미있는 바이오이야기/(5)개인 발간수필모음

[수필] 8. 동아리와 클럽

by 바이오스토리 2013. 11. 21.

동아리 행사가 있다고 떠밀리다시피 학교 뒷골목으로 향한다. 동아리. 예전 대학시절에는 써클이라고 불리웠던 이 단어는 말의 느낌이 좋다. 흡사 둥지에 올망졸망 짹짹거리는 새끼 새들의 모습이 떠 오른다.

학교의 뒷문에는 정문보다는 작지만 그럴듯한 교문이 서있다. 그앞 도로를 건너자마자 좁은 골목들이 늘어서 있다. 신촌이나 대학로 같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오밀조밀한 캠퍼스촌은 늘 학생들로 붐빈다. 나이가 좀 든 대학원생보다는 이제 막 들어온 신입생들이 주로 눈에 띈다. 더구나 지금처럼 학기초에는 좁은 골목에서 어깨를 부딪치면서 지나가야 할 만큼 북적거린다. 제일 많이 띄는 집은 먹고 마시는 집이다.

 

이런 집들이 몰려있는 지역이다 보니 이곳은 근방의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먹자골목으로 알려져 있다. 덕분에 금요일, 토요일 저녁에는 이곳은 외지에서 원정 온 사람들이 이곳 학생들보다 더 많다. 심지어 중고등학생들도 교복을 입은 채로 이곳의 밤거리를 몰려 다닌다. 골목골목 밥집이 있다. 한끼 삼천원 정도의 식사를 제공하는 밥집은 늘 만원이다. 근처에 방을 얻어서 지내고 있는 학생들로 북적인다. 방만 얻어서 지내고 식사는 사서 해결하는 그들은 많은 경우 지방에서 온 아이들이거나 집이 서울에서 먼 경우이다. 자취를 해서 밥을 해먹는 아이들도 있지만 세끼를 해먹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밥집 다음으로 많은 것은 호프집, 그리고 PC방 순이다. 물론 당구장도 보이지만 PC방의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이다.

 

난 당구를 잘 칠 줄 모른다. 남학생이라면 다 할 줄 알던 당구를 왜 접할 기회가 없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리고 보니 바둑도 제대로 둘 줄 모른다. 아마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은 지금이나 학생 때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지금 학교 후문을 건너자 마자 마주보고있는 조금은 낡은 당구장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에도 학교 정문을 나서자 마자 커다란 당구장이 있었다. 그 당구장은 그 시절 학교 앞에 있는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했다. 중국집이 한 건물건너 있었고 나머지는 분식집 수준의 조그만 식당들이었다. 그 시절 대학교 내에는 기숙사가 있어서 대부분의 지방 학생들은 기숙사에 머물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방을 얻어서 자취를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동아리와 클럽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예전 대학교는 이미 다른 대학이 들어서 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건물은 특이한 건축물로 보존 대상이고 연못만이 예전 모습을 지니고 예전 학생을 반긴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몇 달 전의 일이 기억이 아물아물한 적은 있어도 손에 삼십년 전 기억은 또렷하게 거기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학교 앞 정문에 서본다. 지금은 좀 더 화려해지고 좀 더 커진 정문이지만 강의가 끝나고 건너던 큰 길도 그대로 있다. 당구장이 있던 건물도 그대로 이지만 모두 PC방으로 간판이 바뀌어 있다. 거기까지가 나의 기억의 전부이고 그나마 남아있던 건물도 당구장 건물이 마지막이다. 당구장이 있던 건물 뒤로는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나의 회상을 더 이상 용납지 않겠다는 듯이 길을 막는다.

 

어떤 이유로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기억이 분명치가 않다. 지방학생들에게 우선 방을 주었고 그것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집이 멀리 있는 순으로 방 배정을 했던 것 인가. 집이 천안이던 나는 서울에 가깝다는 이유로 낙방이 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천안은 통학하기에는 먼 거리였다. 기차와 버스로 네 시간이 족히 넘는 거리이기에 한참의 젊은 나이라지만 매일 다닐 수는 없었다. 남은 선택은 하숙, 혹은 집에 들어가서 하는 입주 가정교사 그리고 자취였다. 하숙비는 만만치 않았다. 입주 가정교사는 더욱 힘들었다. 남의 집에서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를 구슬리고 성적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집주인을 보면서 웃고 지낼 변죽이 나에게는 없었다. 결국 남은 것은 방을 하나 얻어서 먹고사는 소위 자취였다. 음식에 대한 취미와 재주가 없는 나에게는 이미 해본 적이 있는 그 자취는 낭만과 즐거움이 기대되는 자유로운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자취를 망설이는 나를 한 걸음에 그 방으로 몰고 간 것은 복덕방 주인도 아닌 J 선배였다.

 

J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그것도 버스로 몇 정거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방을 얻어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집이 서울이라고 알고 있었던 우리들 사이에서는 여자와 같이 지내는 것이 아니냐는 수근거림이 한참동안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후줄그레한 그의 모습은 살림을 차린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방에 들어선 J는 나의 이런 의구심을 쉽게 깨뜨렸다. 그동안 경찰을 피해 다니느라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냈다는 것이다. 그때는 데모를 자주했다. 사상이나 정치에서 멀리 있던 공대 학생들도 일주일에 두 서너번은 어깨를 두르고 운동장을 돌아다녔으니까. J는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고 했다. 주모자급도 아니고 어쩌다 한 두번 앞장선 데모였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극적인 도피와 영웅담을 기대했던 나에게 J는 싱겁게 도피생활을 끝내고는 방바닥에 누웠다.

 

그 집을 가려면 학교 앞 아스팔트 길을 건너고 당구장과 중국집 사이로 난 샛길을 따라 가야한다. 개울이 하나 있다. 여름에 물이 제법 흐를 때에는 중간에 놓여있는 돌을 디디어야 건널 수 있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바닥에는 어느 집에서 뿌려놓았는지 연탄재가 널려있다. 개울을 지나서면 오른 편에는 과수원이 산비탈에 걸쳐 있다. 늦은 가을 누런 봉지가 나무마다 매달린 그 곳은 배 밭이다. 사람키와 비슷한 배나무가 촘촘한 그 과수원은 멀리 산자락을 향해서 조금씩 조금씩 올라서 있다. 그 끝자락 능선에는 희색빛의 콩크리트 건물의 지붕이 보인다. 학교 기숙사이다.

 

기숙사 건물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과수원이 끝나는 곳에 여러 집들이 틈을 두지 않고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집들은 대부분 자취방들이다. 개울을 건너서면서 나타나는 대문들은 붙어있기는 하지만 집안의 모습이 훤히 보이도록 엉성하다. 회색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양옆에서부터 방문들이 촘촘히 붙어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 마당의 끝에는 수도가 있고 주인집이 대문을 마주하고 있다. 마주보고 서 있는 방 사이는 하지만 채 몇 걸음이 되지 않아서 마치 창문을 마주보고 있는 감방을 연상케 한다. 방 앞에 붙어있는 한뼘 남짓한 툇마루는 신발하나 올려놓기도 힘들만큼 좁다. 그 위를 올라서면 도화지만한 창문이 달린 문이 하나씩 있다. 그 툇마루 아래에는 방마다 하나씩의 연탄구덕이 보인다.

 

그 집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를 않았다. 우리와 같은 대학생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어찌된 연유인지 건너편 할머니 방을 제외하고는 여덟 개 남짓한 방의 주인공들을 본 기억이 없다. 하기는 그 방에 들어가던 시간들이 대부분 통금이 가까운 늦은 시각이었으니 볼 수 있는 시간들이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방은 토굴처럼 밤에만 들락거렸다.

 

J 선배와 나는 써클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동아리라고 부르지만, 당시의 써클 혹은 클럽은 매주 한번씩 토요일 오후에 모였다. 연줄연줄 아는 사람을 연결해서 모이다보니 자연 친목위주의 모임이 되었고 늘 그렇듯이 남녀의 비율은 반반을 유지하였다. 무슨 대단한 활동도 아니었는데, 자주 만났고 많이 놀러갔고 그리고 무척 마셨다. 봉사활동을 한다고 인천으로 먼 길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렇게 만나야만 일주일이 지나갔다. 물론 놀고 먹는 쪽에 치우치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클래식 기타 연주회도 하고 했으니 나름대로 교양을 흉내 낸 구색도 갖춘 셈이다.

 

매번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그 방은 하지만, 늘 썰렁했다. 허구 헌날 밖으로 돌아다니던 때에 방의 온기를 유지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더구나 유일한 난방수단이던 연탄을 꺼트리지 않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 보다 못한 건너편 할머니가 시뻘건 밑불을 건네주어도 어쩐 일인지 우리 방 아궁이에 들어서기만 하면 비실비실 비 맞은 나무처럼 꺼져버리곤 했다. 비상수단으로 방안에 들여놓은 석유풍로는 심한 그을음으로 데모 때에 맞던 최류가스 보다 심한 냄새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학기가 점점 지나가고 배 밭을 데이트 코스로 삼삼오오 놀러오던 사람들이 줄어들 때는 곧 겨울이 코앞에 있는 때였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기숙사 아래 자취촌은 점점 을씨년 스러워진다. 하지만 배밭 건너 기숙사는 벌써부터 스팀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남향의 그 건물들은 방안 구석까지 들어와 있는 초겨울 햇볕 덕분에 이미 훈훈해져 있다. 칙칙거리는 스팀이 나오는 창가에는 커피병들이 늘어서 있고 여자친구들이 가져왔음직한 꽃들마저 초겨울을 무색케하고 있다. 기숙사 친구의 방은 천국이었다.

 

겨울의 자취촌은 유난히 찬바람이 세다. J는 어디로 다니는지 며칠씩 방을 비운다. 한 겨울, 홀로 들어서는 컴컴한 방은 발바닥이 시리다. 온갖 덮을 것도 모자라 엊그제 대학교 앞 교문에 걸어놓았던 써클행사 안내 현수막까지 더해도 뼈를 시리게 하는 냉기는 막을 수 없다. 윗목에는 얼어붙은 물그릇이 벌써 며칠째 녹지 않고 있다. 연탄구덕은 포기한지 오래이고 잠만 자고 나가는 방안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빛이 들지 않는 벽을 따라 냉기가 얼어붙어 있다.

 

찬 바람이 이는 우리 방과는 달리 훈훈한 곳은 따로 있었다. 우리처럼 천방지축 돌아다니지 않고 늘 조용하던 K 선배는 또한 우리 써클의 주요 멤버이다. 가는 손가락에 그림을 아주 잘 그리던 K는 건축이 전공이다. 세심하고 예민한 것이 건축인지 아니면 K 인지는 모르지만 그 덕분에 그 방은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의 방은 자취방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그 방은 언제나 훈훈했다. 난로 때문이다. 연탄을 사용하던 그 난로는 불이 꺼진 적을 본 기억이 없다. 방안 한 가운데를 차지한 검은 몸통위로 솟은 연통은 벽을 따라 밖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나를 부럽게 만든 것은 난로위에 보글거리는 김을 내 뿜던 주전자이다. 약간의 향기마저 내뿜는 그 주전자 안에는 놀랍게도 감귤껍질이 들어 있었다. 한잔 따라주던 그 감귤차는 기숙사 창가에 놓여있던 외제 커피와 함께 천국의 또 다른상징이었다.

 

먹고사는 모양의 차이가 극심한 자취 촌에서 우리의 위치는 당연히 바닥이었다. K처럼 따끈한 감귤차를 끓일만한 차분함과 세심함이 없었고 변변한 여자 친구 하나 없는 우리는 밖으로 나도는 고슴도치같이 그 방에 머물지 못하고 겉돌았다. 몰론 매주 모이는 써클에는 여자회원들이 있었고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여자친구정도는 만들 수 있었으리라. 또 어쩌다 축제때만 되면 애인없는 변변찮은 동기끼리 단체로 파트너를 구해오기도 했지만 세상에 그냥 되는 게 어디 있는가. 많은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생기는 것이 애인인데 그러기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간과 돈이 없었다. 먹고 살기 바쁜 것이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였지만 궁기가 배인 자취 촌 근처에 여학생이 들락거리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도 있었다. 또한 그런 것은 넘어서는 안 될 어떤 선처럼 그어져 있었다. 우리는 고지식했다.

 

학교 근처 자취 촌에서 우리의 부러움을 가장 많이 받던 사람은 태권도 클럽을 열심히 다니던 Y 선배였다. 덩치가 크고 남자다운 얼굴을 가진 그의 권유로 들어선 나는 태권도 도장을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여자는 강하게 보이는 남자를 좋아하며 태권도가 그 답이다이런 암시를 끝없이 들었지만 내 몸은 그리 유연하지도 강하지도 못하고 이미 자취방에서 얼어붙어 버렸는지 써클 바닥을 청소하는 것이 제일 잘하는 기술이었다. 그런 와중에 학교 축제에 태권도 시범조로 불려 나가게 되었다. 이제 채 한 달을 못 넘긴 내가 맡은 역은 다행히 송판 붙잡아 주기. 시범을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Y. 격파 시범은 공중을 날아서 내가 붙잡고 있는 송판을 발로 격파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기합소리와 함께 부서진 것은 송판만이 아니었다. 자세를 제대로 못 잡은 내 면상에도 발은 날아들어 그만 뒤로 나가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코피까지 주르르. 둘러싼 많은 관중, 물론 여학생들까지 포함된 둥근 원형 한가운데에 대자로 누워있던 나의 모습은 강한 모습의 태권도 전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Y의 방에서는 묘한 향기가 났다. 아기들의 살내음 같기도 하고 분 냄새 같은 것이 늘 은은했다. 총각들만 있는 방에서 나는 고리타분한 냄새, 혹은 발가락 냄새는 흔적이 없었다. 책이라고는 별로 없는 책상에는 대신 꽃이나 화장품이 늘 놓여 있었다. 여자였다. 방의 냄새를 바꾸고 주위의 자취방들과 완연히 다른 방안의 분위기에는 수시로 찾아오는 여자가 있었다. Y는 이미 전공을 접고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데모가 하도 자주 있어서 전공강의가 제대로 되지를 않아서 쉬는 날이 공부하는 날보다 많은 때였다. 주위에서 사법고시를 준비를 하던 사람은 심심찮게 있었지만 이렇게 집까지 찾아오는 여자가 있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어느 병원 간호사라기도 하던 그 여자를 직접 본 적은 없다. 또한 결혼을 했는지의 기억은 지금도 없다. 하지만 얼어붙은 냉방을 벗어나 그 집에서 라면이라고 먹으러 갈라치면 여자의 흔적을 그 방은 남기고 있었다. 그곳은 가장 부러운 천국이었다.

 

J는 맞은 편에 앉아서 맥주잔을 기울인다. 그러고 보니 그를 마지막에 본 것이 벌써 십년이 훌쩍 넘는다. 보스턴 근처의 대학이었든가. J 선배도 나도 아이들이 둘이고 위로는 딸이, 아래로는 아들이라는 것이 같다고 이야기 했던 것이. 그는 최근 책을 한권 쓴 것이 나왔다고 나누어준다. ‘우리나라를 이끄는 과학자들그는 잘 나가는 대학교수가 되어있었다. 물론 큰 등치와 걸걸거리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오늘은 예전 대학때의 써클멤버들이 처음 모인 날이다. 졸업 후 처음 보는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이제는 서로가 궁금한 시간이 되었는가. K는 여전히 섬세한 손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많은 건축물을 보러 다녔는지 얼마 전 다녀 온 인도 이야기가 한참이다.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고 있는 K는 예전의 서클 멤버 중에서 가장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차분한 성격은 여전하다. K가 졸업 후 지방대학에 자리를 잡고 그 집 아이들이 뛰어다닐 무렵 그의 집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시내를 흐르는 강이 앞으로 보이고 건너편에는 산이 보이는 곳의 집에서 여자 아이 둘은 찾아온 손님에게 인사를 한다. 바깥의 경치가 좋다며 아파트 옥상을 K는 부인의 손을 잡고 올랐다. 약간은 마른듯한 부인은 남편이 학교에서의 강의 중에 있던 일, 건축에 관한 이야기등을 처음 본 나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 해주었다. 천성이 밝고 명랑한 모습은 사람을 편하게 한다. 나는 그 때의 그 기억에 미소를 짓는다. 앞에 앉은 K는 인도이야기를 끝냈는지 맥주로 목을 축인다.

 

병원의 지하실에 위치한 장례식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방이기도 하려니와 연락을 받자마자 내래온 까닭에 화환만이 한 두개 입구에 서 있을 뿐이다. K는 철철 운다. 상가에서 저렇게 우는 사람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마주 절을 하는 우리들도 속울음을 삼킨다. 불과 열흘이 채 안되었다. K가 먼저 내려간다며 다음에는 K의 집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한 것이. 그리고 K는 부인의 음식솜씨를 은근히 자랑했었다. 음료수를 날라다주는 여자 아이 둘이 검은 상복을 입고 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한다는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아직도 그렁그렁한 눈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한다. 영정속의 K 부인의 얼굴을 두 아이는 빼놓은듯이 닮았다.

 

오늘도 나는 학교 뒷골목을 지나간다. 당구장을 지나서 좁은 길을 가노라면 거기에 냇물이 보이고 늘어선 집들이, 내방이, K의 방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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