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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재미있는 바이오이야기/(5)개인 발간수필모음

<1>버스 안에서의 단상

by 바이오스토리 2013. 3. 15.

오늘은 아침 출근버스가 삼분이나 늦었다. 쌀쌀한 아침 바람 속에 기다리는 시간이 삼십분은 족히 된 것 같다. 혹시 다른 사람이 내가 툴툴거리는 소리를 들었다면 아마도 통근버스를 타는데 몇 십분은 걸리는 거리에서 힘들게 온줄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스가 서는 이 곳 에서도 방금 빠져나온 아파트 창문이 코앞에 보인다. 버스가 서는 곳은 아파트입구의 바로 길 건너에 있다.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집에서 뛰어나와도 될 만큼 가까운 거리로 먼 길에서 택시를 타고 오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축복받은 자리이다.

 

조금 늦었다고 미안해하는 운전기사를 본척만척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아침부터 심사가 편치 않다. 제출하지 못하고 미루고 있는 과제의 보고서, 내일까지 보내달라는 논문, 채점해야 되는 시험지등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짓누르고 있다.

 

버스는 이곳에서 타면 바로 학교 사무실 앞까지 데려다 준다. 늘 앉는 자리이지만 오늘따라 천정에서 나는 잡음이 신경을 거스른다. 무슨 나사가 빠져있는지 차가 움직이는 동안 삐그덕 삐그덕 들릴락 말락 신경을 자극한다. 도대체 기사는 이런 문제를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뭐라고 해주고 싶지만 새벽 일찍 집을 나선 운전기사에게 무어라 하기도 무엇하다. 덕분에 속만 부글거린다. 학교 당국은 도대체 복지에 관심이 있기는 한 거야.

 

이제 며칠 내로 업적평가서를 내야한다. 매번 논문을 쓴다고는 하지만 당국은 끊임없이 많은 논문 제출을 요구한다.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어. 어제 저녁 누군가가 술자리에서 푸념삼아 하던 말이 아직 덜 깬 머리와 함께 남아있다. 그래 교수도 별거 없어. 월급이 많기를 해, 일이 적기를 해, 학생들이 버스에서 자리를 비켜주기를 해.. 그 말에 끄덕 끄덕 동조를 했던 기억이 흔들리는 차안에서 속을 미식 거리게 한다.   오늘은 아침 출근버스에서부터 기분이 안 좋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뿐만 아니고 삐걱거리는 버스천장의 소리는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었다., 요즘 들어 매일같이.

 

통근버스는 이제 시내 한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아침 출근시간의 시내 길은 막힌 차량과 그 사이를 빠져가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고등학생들이 학교 앞의 좁은 골목길을 몰려간다. 가방을 어깨에 삐딱하게 메고 삼삼오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듯, 웃고 장난치는 모습들이 커다란 창문너머로 훤하게 보인다. 그들의 웃는 모습은 마른 창문에 화풀이를 하던 나를 머쓱케 한다.

 

환하던 창문이 갑자기 무언가로 꽉 찼다. 바로 차 옆으로 시내버스가 바짝 붙어 선다. 높이가 비슷한 학교출근버스와 시내버스가 나란히 서니 내가 앉아있는 바로 옆으로 시내버스의 사람과 얼굴을 맞댄 형상이다. 그나마 훤한 창문 덕분에 거울을 마주본듯한 바로 그 시내버스는 많은 사람으로 꽉 차있었다. 앞뒤로 꼼짝 못하고 빈틈으로나마 조금 움직이는 머리로 내가 타고 있는 버스를 아래위로 보는 모습의 청년이 보인다. 옆면에 학교이름이 커다란 버스 안에서 넉넉한 자리, 안락한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는 대학교수를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나는 눈을 돌린다. 거기 만원버스에서 나를 보고 있는 청년에게서 예전의 나를 본다.

 

지금은 다른 대학교가 들어서 있는 공릉동의 공대 건물은 서울시내에서는 아주 변방에 있는 머나먼 곳이었다. 그 시절 공릉동의 시내버스는 두 번호의 버스만이 학교 앞을 통과했다. 운행거리도 길고 배차시간도 길어서 버스를 한번 놓치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담배 두서너 대는 족히 태워야했다. 청량리는 공대생들이 주로 버스를 이용하던 곳이었다. 물론 종로가 번화하긴 하지만 여학생들이 끼인 행사나 클럽활동이 아니면 주로 청량리 뒷골목 소주집이나 중국집이 모임의 장소가 되곤 했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서이던, 소주에 얼얼해져서 버스를 기다리던, 버스 정거장은 긴장이 흘렀다.

 

다가올 전투를 기다리며 배낭을 챙기는 군인들처럼 장기간의 전투 아닌 전투를 우리는 준비했다. 물론 다시 한 번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은 시험장에 수험표를 챙기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절박한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저기 멀리서 눈에 익은 숫자의 버스가 보인다. 이미 만원임을 알려 주는 듯 운전사 옆으로 빼곡하게 선 사람들이 보인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밀고 올라선다. 올라서려고 힘을 쓴다기보다는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버스입구에 튀어나온 벌집모양으로 우리는 무조건 매달렸다.

 

문을 닫기 위한 차장과 운전사의 노련한 협동작전은 매달린 우리들도 감탄치 않을 수 없을 만큼 절묘한 것이었다. 버스는 출발과 동시에 왼쪽으로 크게 휘어 돌면서 사람을 한쪽으로 몰아댄다. 짧은 비명소리와 동시에 혹처럼 매달린 우리는 그 순간 안으로 밀려들어 간다. 등 뒤로 차장이 재빨리 문을 닫고 출발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닫힌 문으로 다시 짐짝처럼 밀쳐진다. 학교로 돌아 갈수 있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마주보고 킬킬거린다.

 

밤늦은 버스, 게다가 자정이 다가오는 무렵의 시내버스는 텅 빈 거리를, 때로는 한산한 들판을 달린다. 한적한 들판의 한 가운데에서 상자 하나에 사람들을 두루마리 휴지처럼 집어넣고 버스가 달린다는 것은 지극히 기이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학교가 있던 공릉등, 그리고 더 지나가 종점인 상계동은 많은 서민들이 모여 살던 변두리 마을이었다. 불빛이 화려하고 통기타 소리가 흘러내리던 술집이 금마차를 타고 간 신데릴라의 무도장이라면 한 밤중의 공릉동 시내버스는 시간에 쫓겨 돌아오는, 남루한 모습의 신데릴라를 태운 낡은 달구지인 셈이다.

 

시내에서 밤늦게 돌아오는 버스가 짐짝처럼 사람을 실었다면 저녁에 시내로 나가는 시내버스는 우리들을 콩나물시루처럼 실었다. 그래도 대학교 앞이라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종종 줄을 만들곤 했다. 그 늘어선 모습이 악보에 그려진, 늘어선 콩나물 같았다. 머리가 크고 몸이 호리호리한 콩나물은 음식 중에서도 가장 여리고 못 먹어서 바짝 마른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을 연상시킨다. 대학 때의 내 모습이 콩나물과 비슷하다고 기억이 남는 것은 나의 실제 모습이 그랬는지 아니면 차례로 줄을 서서 버스 안으로 들어선 모습이 콩나물 시루 안에 빼곡한 노란 콩나물 같아서 인지는 분명치 않다.

 

줄지어 오른 버스가 바로 떠나지를 않는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내미는 바로 그때 일련의 퇴근버스들이 줄지어서 학교정문을 빠져나간다. 대통령이라도 지나가는 것 같다. 학교 정문 앞에 있던 제복의 수위들이 차례로 경례를 붙이고 시내버스는 그 차들이 다 지나가도록 막아놓는다. 이미 숨이 막혀오기 시작하던 시내버스 안에서 지나가던 스쿨버스에 타고 가던 사람들을 본다. 넉넉한 의자에, 넓은 창에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사람들. 그들을 나는 시내버스 안에서 망연자실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참으로 사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엇이 될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불분명하던 그 시절의 대학생에게 그들은 마냥 부러운 존재였다. 내가 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곳에 그 사람들은 앉아있었다. 내가 감히 될 수가 있기나 한 것일까.

 

나는 한 번도 학교에서 분필을 잡는 것이 내 꿈이라고 써 본적이 없다. 초등학교에서 매번 채워야 하는 장래의 희망은 극단이었다. 대통령과 동사무원. 물론 둘 다 공무원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 두 개가 진지한 고민 뒤에 나왔다는 기억이 또한 없다. 대통령은 당시 아이들에게 제일 많이 나오던 가장 흔한 장래 희망 직업이다. 또한 반에서 줄반장을 한번이라도 한 아이들의 경우는 대통령이 장래 희망직업란을 채워야 하는 것으로, 일종의 의무사항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으리라.

 

동사무원, 이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어린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하지만 땡볕의 여름, 한 시간을 걸어서 도달한 시골의 동사무소는 천국이었다. 널찍한 장소에서 시원한 선풍기가 돌고 있었다. 더구나 넉넉한 의자에 앉아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느긋하게 상대하던 그 사람들은 지극히 부러운 사람들이었다. 동사무원이 나의 장래 직업란을 그때부터 채우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차례대로, 줄을 서서 입장하는 것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많은 시간이 흘렀다. 대학교수가 되고 싶었다는 기억이 전혀 없이 지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훈장이 되어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도 않고 제멋대로이다. 목표를 가지고 그것이 되고 싶어서 안달을 해도 될까 말까한 것이 대학훈장이라고들 하는데 확실한 꿈도 없이 살아온 나에게 훈장이 되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학교 선생은 내가 원하던 선택이 아니라 이것저것 내가 하지 못하는 일에서 밀리다보니 결국엔 그길로 간 건 아닐까.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서 지낼 수 있는 변죽이 없어서 사업은 나와는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치부했다. 회사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혼자 끙끙거리며 실험을 하는 것인 반면 지금은 회사의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들은 여러 사람들과 늘 활발하게 어울리고는 했으니 말이다. 다른 대학동기들이 졸업 후 모두 다른 대학이나 연구소로 병역을 대신하여 대학원을 가는 사이, 나는 최전방의 철책을 돌고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바람이 불어서 모두가 가지 않으려던 군대를 가겠다고 덜컥 정했는지도 분명치가 않다. 다만 이것 역시 고민하고 고민한 기억이 없다. 마치 동사무원이 어느 순간부터 나의 장래 직업란을 채웠던 것처럼 어느 순간 손을 들고 군대를 자원해 갔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한 시간 내내 써서 보낸 위문편지에 며칠 뒤에 답장이 왔다. ‘국군장병 아저씨께‘ 로 시작하는 판에 박힌 위문편지에 답장이 오는 ’신기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더구나 잡지에나 나올듯한, 반짝이는 소위 계급장의 국군아저씨의 근사한 사진과 함께 온 편지는 그 뒤로 몇 년 동안 나의 책상서랍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때 보았던 소위 계급장이 멋있어 보였던 것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생각의 밑바닥에 그 사진이 나를 전방으로 보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당시의 생활을 군대생활은 잡아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이년 내내 군복을 입게 한 것일까. 하루하루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와는 달리 나의 시간은, 시내버스에서 흔들리듯, 이리저리 흔들리며 지나갔다.

 

넉넉한 의자에 몸을 기댄 그 모습의 공릉동 학교버스가 내 생각의 밑바닥에 눌러 앉았던 걸까, 아니면 이 산도 높아 보이고 저 언덕도 가파르게 보이니 그나마 앞길에 남아 있는 계곡 길을 따라가다가 다다른 곳이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일까. 가다가다 보니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출근버스의 창가에 앉아서 내일 내야할 많은 분량의 보고서에 툴툴거리고 있는 중년이 여기 있다.

처음 학교에 강의를 하려고 출근버스에 오르면서 맨 앞자리의 널찍한 의자에서 시원한 창문을 보며 좋아했던 기억이 어제 인 것 같은데... 변변치 못한 주변머리에 그나마 살고 먹을 곳이 마련된 행운에 얼떨떨하던 때가 바로 앞에서 잡힐 만큼 어제 같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창가에 앉아서 화난 모습의 내 얼굴을 보게 된 것이.

 

성벽처럼 마주보고 서 있던 시내버스가 멀어져갔다. 다시 환해진 창가의 나는 비로소 깨어난다. 마주보고 있던 시내버스에서 선망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청년은, 공릉동의 그 청년은, 지금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인가. 대학시절 그렇게 부러워하던 학교버스의 넉넉한 의자에, 지금은, 앉아서 웃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에 새삼 부끄러워진다.

 

이제 버스는 학교 안으로 들어선다. 갑자기 배가 고파진다. 식욕이 살아난다. 내리는 버스에서 실로 오랜만에, 운전사에게 잊었던 인사를 한다.

 

덕분에 잘 왔습니다.

 

 

2009.03. (서울대 화공동창회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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