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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앙일보연재;김은기의 바이오토크/(4)첨단 바이오

[중앙SUNDAY 김은기의 ‘바이오 토크’]<13> 겨울잠 재우기

by 바이오스토리 2013. 10. 29.

동물의 오묘한 동면기술, 인간도 활용 눈떠

김은기의 ‘바이오 토크’ <13> 겨울잠 재우기

김은기 인하대 교수, 생명공학 전공 ekkim@inha.ac.kr | 제346호 | 20131027 입력

1 겨울잠을 준비하는 북극곰.
2 촉각을 다투는 심장수술. 사람에게 겨울잠 같은 상태를 유도한다면 수술 효과가 한층 높아질 것이다.
혈기왕성한 20대 때 친구들과 8월의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었다. 한여름이라 반소매 차림에 별다른 준비 없이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로 흠뻑 젖은 몸은 산 정상의 싸늘한 바람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추위 때문에 버너에 성냥을 긋지 못할 정도로 떨리는 손을 애써 멈추려 해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순간 가장 많이 떨던 한 친구가 안 보였다. 바위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의 얼굴은 오히려 평안해 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떨어서 성냥을 못 그었던 필자는 저체온증 1기, 그리고 바위에 앉아 졸던 그 친구는 의식이 혼란스러워지는 저체온증 2기의 위험한 상황이었다.

저체온증은 인간의 정상체온이 섭씨 35도 이하로 떨어지면서 발생한다. 이런 상황이 방치되어 체온이 27도까지 떨어지는 5기에서는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어 결국 심장마비가 발생하고, 심장마비 5분 후부터 뇌세포는 산소 부족으로 죽어가기 시작한다. 저체온증 사망자의 20~25%는 오히려 옷을 벗어 던진채로 발견된다. 저체온증으로 뇌의 온도감지기관이 고장 나서 오히려 덥다고 느낀 것이다. 저체온증이 더 위험한 것은 정작 환자 본인은 이런 증상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필자가 저체온증이었는지, 졸던 친구가 위험한 단계였는지 당시 극심한 추위에 떨던 우리가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이 생기면 신속하게 젖은 옷을 바꿔 입히고, 심하면 알몸으로 껴안아서라도 체온을 올려야 한다. 우리 몸에 열이 나는 것도 문제지만 저체온이야말로 생명과 직결되는 초응급 상황이기 때문이다.

해발 3000m서 22도 체온으로 24일 생존
우리 몸은 보일러처럼 근육이나 심장에서 불을 때고 피부·폐 등을 통해 열이 빠져나가면서 늘 섭씨 37도로 체온을 유지한다. 어떤 이유로 체온이 낮아지면 이를 보충하려고 더 불을 때면서 산소를 더 많이 소비한다. 소변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떠는 이유도 빠져나간 열을 보충하려는 동작이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일부 동물은 이런 상황, 즉 날씨가 추워지면 굳이 힘들여서 체온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아예 보일러의 온도를 낮추는 것처럼 체온을 내린다. 즉 대사 속도를 스스로 낮추는 것이다. 당연히 체온은 내려가서 겨울잠을 자는 곰의 경우 30도, 쥐는 15도, 북극다람쥐는 영하 3도까지 내려간다. 이때 심장은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뇌는 가사상태의 동면, 즉 겨울잠으로 한겨울을 난다. 겨울잠은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을 나기 위한 동물의 ‘기막힌’ 생존 방법이다. 왜 동물은 스스로 에너지 소비를 낮추어서 낮은 온도에서도 충분히 살아남는데 사람은 정상체온에서 2도만 떨어져도 정신이 혼미해져 설악산 정상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꾸벅꾸벅 조는 것일까? 사람은 겨울잠이 불가능한 것일까? 실제로는 인간 겨울잠의 가능성을 보인 ‘아주 보기 드문’ 사건들이 있었다.

2006년 10월 일본의 해발 3000m 로코코산에서 미쓰다 우치코시(30)가 실종되었다가 24일 만에 산 채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그의 체온은 22도. 그 정도면 보통 이미 죽은 사람의 체온이다. 당시 그의 심장 박동은 거의 느낄 수 없었고 장기 기능은 거의 마비된, 죽음 직전의 상태, 즉 가사상태와 같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회복한 뒤 검진하니 그의 뇌는 말짱했다. 마치 동물들이 겨울잠을 자듯 차가운 날씨와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24일간 낮은 체온 상태로 생명을 유지한,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의사들의 해석은 이렇다. 실족하면서 의식을 잃었고 몸의 대사속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 즉 겨울잠의 첫 단계가 우연히, 아주 드물게 발생했을 것이란 것이다. 그의 뇌는 이 단계에서 급히 대사속도를 줄였고 덕분에 산소를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아주 조금씩 심장이 움직여 산소를 보내도 뇌세포는 살아서 견디었다는 것이다. 미쓰다의 경우 말고도 이처럼 사람도 겨울잠이 가능할 거라는 단서를 준 사건은 또 있었다.

1999년 스웨덴에서 안나 바게홀름(29·여)이 스키 사고로 얼음 호수에 80분간 빠졌다가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그녀의 체온은 섭씨 13.7도. 모두 그녀가 죽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병원에서 그녀는 소생했다. 뇌세포도 완벽하게 보존돼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심장마비로 혈액 공급이 끊기기 전에 뇌는 아주 찬 물속에서 이미 ‘대기’ 상태로 있었다고 의학계는 본다. 일본이나 스웨덴 사건은 물론 특수한 경우다. 전문가들도 이유를 짐작할 뿐이지 이것을 과학으로 증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겨울이면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겨울잠을 잘 필요가 없도록 진화해왔다. 하지만 그런 ‘겨울잠 기능’이 숨어 있다가 사고 발생 시 우연히 나타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인위적으로 사람을 겨울잠과 같은 ‘죽은 듯한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심장마비 등으로 촉각을 다투는 환자들을 위해 치료 가능 시간인 ‘골든타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즉 간단한 ‘겨울잠 유도’ 주사 한 방으로 몸속의 보일러 태우는 속도를 인위적으로 낮추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심장마비가 일어나도 수시간 동안 뇌세포를 생존시킬 수 있다면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거다.

2013년 9월 미 신경과학잡지(J. Neuro science)에는 동물을 인공적으로 겨울잠을 재웠다는 흥미 있는 얘기가 실렸다. 즉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쥐에 어떤 물질을 주사했더니 마치 겨울잠에 들어간 것처럼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떨어지고 체온도 15도까지 떨어졌고 호흡이나 심장박동을 거의 느낄 수 없는, 즉 죽은 듯한 겨울잠 상태가 된 것이다. 이때 사용한 주사 물질은 A1AR 수용체, 즉 겨울잠 신호버튼을 눌러 한 방에 잠을 재운 것이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겨울잠과 유사한 상태를 어떤 물질을 사용해 이룬 것은 이번 연구가 처음이다. 하지만 겨울잠은 꼭 추운 곳의 동물만이 사용하는 기술은 아니다.

2011년 ‘사이언스’ 잡지에 의하면 따뜻한 곳에 사는 일반 곰도 주위 온도에 큰 상관없이 먹을 것이 부족하면, 몸의 보일러 가동률을 50%나 낮춰 완전 겨울잠은 아니지만 잠자는 상태에 빠진다. 신기한 것은 영양 상태가 안 좋을 때 잘 나타나는 골다공증이 겨울잠 동물에게는 안 보인다는 것이다. 동물의 겨울잠은 대단한 기술이다. 아직 인간에게 적용된 경우는 없지만 2013년 미 공공과학도서관 학술지(PLOS)에는 인간과 가까운 여우원숭이도 따뜻한 지역이지만 ‘겨울잠’ 같은 상태를 만든다는 것을 밝혔다. 쥐·곰 그리고 원숭이도 겨울잠을 자는 기술이 있는데 사람은 정말 없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 모르는 것인가? 만약 어떤 주사 한 방으로 사람을 죽은 것 같은 겨울잠 상태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떤 일이 가능할까? 그 가능성은 상상 이상이다.

따뜻한 지역 곰, 식량 없으면 잠으로 때워
현재 심장 수술 시 저온요법을 병행하는 경우가 있다. 즉 수술 환자 몸에 차가운 담요를 덮거나 혈액의 온도를 낮춰 체온을 30도, 혹은 그 밑으로 내린다. 이 경우 몸의 활동이 낮아지면서 뇌세포나 주위 조직이 죽는 확률이 줄어든다. 하지만 이 방법엔 어려움이 따른다. 이 상태에서는 수술 가능 시간이 짧고 체온을 인위적으로 내리면 몸은 이를 원위치하려고 여러 가지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심장 박동을 더 빨리 하거나 근육을 심하게 수축시키는 운동을 한다. 이 때문에 이를 조절하는 약물을 주입해야 하고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런 경우 ‘겨울잠 유도 주사’ 한 방으로 온몸에 ‘자, 이제부터 몸의 보일러 온도를 내린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면 몸은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처럼 스위치를 ‘안전하게’ 또 ‘차례차례’ 내릴 것이다.

겨울잠의 원리를 이용한다면 우주여행도 가볍게 다녀올 수 있다. 일러스트 박정주
또 하나는 공상과학에서 보던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2030년이면 우주여행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화성까지 우주 비행시간은 편도에만 1년 반이 소요된다. 현재 서울에서 뉴욕까지 가는 비교적 짧은 여행에도 승객 1인당 필요한 물ㆍ음식의 무게가 엄청나다. 하루도 안 되는 여행도 이런데 1년 반 동안 우주인이 깬 상태로 활동한다면 필요한 물건이 무척 많아져 무게가 대단해진다. 그런데 죽은 것처럼 잠을 잘 수 있다면 이런 모든 게 불필요해진다. 이런 상상은 공상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이제 화성입니다.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겨울잠이 가능해지면 1년 반의 긴 여행에 소요되는 식량을 평소의 1%까지 줄일 수 있다. 게다가 신체 세포는 거의 완전한 휴식을 한 셈으로, 시간이 흘러도 신체 나이는 늘지 않는다. 이렇게 몸의 온도를 일부러 낮추는 ‘인간 겨울잠 기술’이 가능해진다면 공상영화에나 등장하는 ‘인간냉동 기술’, 즉 인간의 몸을 영하 196도로 얼려 저장했다가 훗날 다시 깨어나기를 바라는 기술이 가능해질까? 인간냉동 기술은 아직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먼 훗날 이야기이지만 ‘겨울잠 기술’은 그 첫 단추가 되지 않을까?

동물은 추운 겨울, 부족한 식량 때문에 겨울잠이라는 최소한의 자구책을 진화 과정에서 마련했다. 생존의 고수인 동물들이 갖고 있는 이 오묘한 기술을 인간은 이제 겨우 알아내기 시작했다. 이 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순전히 인간의 몫이다. 겨울잠, 즉 동면(冬眠)은 아주 긴 잠을 자는 것이다. 인간이 겨울잠을 자려는 것은 어찌 보면 영원히 잠들지 않고 살아있으려는 영생(永生) 욕망의 역설적 표출이 아닐까?



김은기 서울대 화공과 졸업. 미국 조지아텍 공학박사. 한국생물공학회장 역임. 피부소재 국가연구실장(NRL) 역임. 한국과학창의재단 STS사업단에서 바이오 콘텐트를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www.bioc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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